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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제한 명령’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by 장대선
2020-08-23
전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잘 대처해 오던 우리 사회가, 최근 교회질서를 어지럽힌 한 목회자의 일탈로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나 그 목회자는 그동안 현 정부에 대해 좌파정권 혹은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며 온갖 시위를 해오던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뒤엉켜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는, 단순히 방역상의 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올바른 이해의 요구까지 참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각 사안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정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현 사태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먼저 바이러스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공교롭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질서의 상황 가운데서 그 확산이 급격해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동안 방역당국과 국민들 전체가 상당한 질서와 협조를 보여준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방역당국의 혼란과 국민들의 무질서 가운데 있던 사회에서는 심각한 피해와 확산을 보여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신천지 그리고 앞서 말한 그 목회자의 경우는 혼란과 무질서가 낳은 전형적인 결과를 입증한다. 특별히 신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지금 불거진 한 목회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방역지침과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무질서한 인물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와 교회 사이는 분리로서 규정지을 수 없는 지점이 있으며, 그 지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너무도 중요하다. 방역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는 불가피하게 교회의 예배와 관련하여 지침과, 심지어 통제를 단행해야만 하는 경우가 명백히 있음을 지금 우리들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 모인 가운데서 수행한 행위가 실정법에 벗어나거나 저촉되는 경우, 예컨대 불미스런 스캔들이나 허위와 같은 것으로 인해 교회에서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공권력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운영에 관한 조사와 행정적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정치의 사실상의 부재 가운데서 교회의 재산권과 관련된 무수한 분쟁들이 대부분 실정법의 판결 말고는 다른 중재가 되지 않는 형편에서, 교회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부득이하게라도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서, 국가가 과연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로 그 역할을 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 혹은 여전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또 한 번 다루어 보기로 하고 우선 불거진 정부의 통치행위, 혹은 통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자.그런데 정부의 통치, 혹은 통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고한 편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로서는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6세기말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산출한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정교분리가 아닌 독특한 연계와 구별 가운데 아주 잘 규정되어 있어서, 비로소 이를 근거로 이 주제를 정확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에 따라 정립해 볼 수가 있다.먼저 제2치리서는 1장의 “교회와 교회정치의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세속정치와의 차이점”이라는 주제 가운데서 4항에 이르기를 “교회의 권세와 정치는 세상 권세 혹은 국가[공화국]의 시민 정부에 속한 권세 및 정치와는 속성상 다르다.”라고 하여, 교회와 국가 운영의 정치원리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곧장 4항은 이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로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는 것이 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즉 국가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권위]는 공히 하나님께 속한 목적에 따라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후자의 문맥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는 거의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결코 교회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의 주권과 뜻에 따라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는 우리의 기초적인 믿음으로 볼 때,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를 부정하고 현재와 같이 엄격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국가의 정부와는 별개의 교회 정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단적인 예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바티칸 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과 같이, 세속 정부와는 전혀 별개의 시스템으로 교회들이 성립해야만 할 것이다.그렇다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관원들과 직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이해와 자세로서 대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제2치리서 1장 9항에서 명확히 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9항은 이르기를 “교회에 속한 사역자와 그 외 모든 사람은 세상 관원(civil magistrate)에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 하고, 교회 정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자들 모두 상호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마서 13장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에서 인출하는 것이다.그런데 제2치리서 1장 9항은 또한 규정하기를 “이 두 재판관의 권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즉 국가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까지 가져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세가 국가의 권세까지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어지는 규정에서 이르기를 “세상의 권세는 칼의 권세[사법권]이고, 다른 하나[교회의 권세]는 열쇠의 권세[영적 권세]다.”라고 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즉 교회의 권세는 말씀[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늘(Heaven)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수행하고, 세상의 권세는 ‘칼’[사법권]에 따라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권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즉 두 권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에 속한 사역자[목회자]와 그 외 모든 사람[신자들]은 세상 관원에게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세상 권세도 말씀[성경]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이며, 다만 그 기능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세속 권세인 정부의 행정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의 차원에서 기독교회들의 예배를 잠정적으로 비대면으로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즉 얼핏 그 모양이 그 권세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외적인 수단 즉 칼의 권세로는 결코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없다.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오히려 영적인 것, 곧 말씀의 권세다. 그런즉 말씀의 진리를 희석해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인 속성을 통제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방편이다.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수 없도록 예배를 폐지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4)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칼의 권세로서는 결코 영적인 권세를 행사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사실을 제2치리서 1장 13항에서 언급하기를 “관원은 칼과 다른 외적인 수단들에 의해 순종을 요구하지만, 목회자는 영적인 칼과 영적인 수단들로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한 것이니, 칼로서는 결코 영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억지로 교인들을 강압하여 끌고 가는 방식은 전혀 영적인 방식인 목회의 방식이 아니다.사실 우리 정부는 현재 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에 있는 한, 그런 정부의 지침이나 행정력은 전혀 예배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지나친 월권이라 생각하여 저항하려고 하다가는 자칫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는 말씀에 스스로 저촉되려는 것이 아닌지 신중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4)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제어하여 더 큰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을 대적하는 악을 행하여서 공연히 칼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지 더욱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부가 기독교의 예배를 방해하려는 목적일 리가 없는 한, 지교회와 사역자들 모두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 내의 일부 무분별한 사역자가 현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상태에 관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대면하여 모이는 회중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진지한 상황인식을 토대로, 바로 지금이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임을 인식하고,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The Discipline of the Reformed Churches of France. 1559) 10장 3조의 문구를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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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표적과 이적을 행했나
by Greg Morse
2020-08-22
기적을 믿지 않지만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한 의대생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보리떡과 생선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그는 “그런 종류의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원칙과 이성 그리고 과학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불과 연기를 보고 놀라던, 자연현상을 보면서 신이 인간 영역에 침범했다고 두려워하던, 그런 무식한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기적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가능한 방도는 다 취하고 싶어했다. 설혹 그가 이해하는 범위 밖의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그는 기꺼이 그런 일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님께 아픈 가족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고,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여자와 데이트하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으며 또 종종 식사 기도도 하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다. 그는 표적과 이적을 갈구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기적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비비디 바비디 부(Bibbidi Bobbidi Boo)신데렐라의 요정 대모는 지팡이를 물결치듯 흔들어서 호박을 마차로, 쥐를 암말로, 말을 마부로, 개를 시종으로, 그리고 넝마를 가운으로 바꾸었다. 바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주문을 통해서. 뜻도 없는 횡설수설을 늘어놓는데 기적이 일어났다.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우리 주님이 일으킨 기적과 완전히 대조된다. 말(words)이 기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적이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 예수님은 독백으로 하는 그의 말에 밑줄을 긋고, 강조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였다. 기적을 통해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 왕국은 그의 설교에 신성한 빛을 비추었다. 그 기적들은 선포하고 있다. “하늘의 왕이 여기 있다. 그의 말을 들어라.”선한 목자가 군중을 앉히고 기적적으로 많아진 빵과 물고기로 그들을 먹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나는 세상의 빵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감으로, 그는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더 큰 논란의 여지를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 죄를 용서하는 이가 있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킴으로 예수님은 바로 다음 메시지에 강력한 느낌표를 찍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예수님의 목소리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풍랑이 잔잔해지며, 귀신들이 살려달라고 사정하며 돼지 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다음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누구이기에”(막 4:41).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의심하는 기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 의대생은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나도 오랫동안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단지 요정 대모가 마술 지팡이를 돌리면서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워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살라 가둘라 메칙카 불라비비디 바비디 부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법사가 아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 안에서 그냥 죽도록 놔두지 않는다. 기적을 행하는 설교자우리 주님의 대속과 그에 따른 부활을 가장 잘 예언하는 구절 중간에 이사야는 이런 말을 넣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하나님의 종이 받은 이런 고통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기 위해서다. 마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가서 열병을 앓는 그의 장모를 고쳤을 때 이 구절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물론 그날 저녁 예수님이 병을 고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 8:14-17). 요점은? 예수님은 삶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을 외면하지 않는 동정심이 많은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꺼이 가던 길을 돌려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분이며, 또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듯이 우리를 고치는 분이다. 단지 영원한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대신 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우리의 지금과 영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던 즈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기적을 찾는 와중에 돌연 기적을 행하던 동네를 떠남으로써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그는 동네에서 멀어졌다. 그는 물론 천국도 떠나 이 땅에 왔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갈릴리에 있는 아픈 사람들을 다 고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적, 표적 그리고 놀라운 일들은 다 청중으로 하여금 앉아서 열심히 듣고 메모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니고데모는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지 단지 떠돌이 기적 연출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구세주다. 비록 그의 기적은 수천 명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라고 한탄하게 만든 가르침과 함께 왔지만, 그중에서 소수는 그와 함께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바로 “영생의 말씀”(요 6:68)임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정 대모는 우리로 하여금 쇼를 구경할 준비를 시키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의 영광과 탁월함에 걸맞는 수준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벧후 1:3).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놀라운 일을 이루도록 했다. 우리가 사악한 이복 누이의 희생자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서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비디 바비디 부가 아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안전한 지시 사항을 주었고(마 28:20), 그로 인해 우리는 이제 그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요 15:10).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고, 병을 고쳐주며 또 이적으로 놀라움을 주는 왕에 대한 생각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막상 그 왕이 세상에 와서 회개하라고 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했을 때, 무엇보다 그를 가장 사랑할 뿐 아니라 그를 유일한 길, 하나뿐인 진리, 유일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왕관을 씌워 주었다. 우리는 하늘의 위로를 땅에 가져다 주는 선지자를 좋아했다. 우리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드러내고 대신 당신의 의를 드러내신 하나님을 미워했다. 와인은 다 떨어졌고 식사와 함께 오락도 끝났다. 우리는 이제 이 정도면 하나님도 충분히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바를 예수 대신 선택했다. 기적이 돌아올 때왜 이것이 중요할까? 한 가지 이유는 공개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의 날이 반드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불신을 자아내는) 자연주의라는 가짜 신은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적을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할 날이 올 것이다. 또 인터넷에서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소위 말하는,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 조차 보고 놀랄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알던 그 의대생은 그가 믿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상이 될 것이다. 기적은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해 우리의 배가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에게 해가 되는 이것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많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계 13:13-14) 것과 같은 “큰 표적”이 올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불법의 사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실제 표적과 놀라운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세상이 항상 원하는 그런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를 치료하고 예언하고 또 우리의 배를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가 싫어하는 설교 없이 이뤄질 것이다. 이 불법의 사람은 너무나 설득력 있고, 매력있고,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매력적이기에 심지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조차도 속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위험한 날에 사탄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에 휩쓸려서 속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함으로 구원받는 길을 거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애롭고 능력에 넘친 기적과 표적 그리고 이적을 일으키면서 “가르친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허락한 가짜 기적들, 우리가 과연 온 마음과 영혼으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이 페이스 북 페이지와 저녁 뉴스를 채우도록 허락한 가짜 기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신 13:2-3).베들레헴의 별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했듯이, 그분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듣도록, 그리고 듣고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적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하게 하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angerous Miracles: Why Jesus Did Signs and Wonder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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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음, 하나님 경외의 원리
by Michael Reeves
2020-08-07
시편 130편 4절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이 구절은 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이다”라고 해야 맞지 않은가? 굳이 경외,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구절이 “그러나 심판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그런데 시편 구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더 이상한 것은, 이 시편 저자가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4절을 지나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5-6절). 그는 이렇게 확신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인다.“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새 언약이 주는 경외C. I. 스코필드(Scofield)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구약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구절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단지 구약의 경건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은 사실상 새 언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예레미야 33장에서 새 언약이 가진 경외감의 특징을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예상을 허물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물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예레미야 33장에서 주님은 순전한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풀어놓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바로 이런 모든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을 통해서 묘사한 경외감의 일종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것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향해서 가지는” 경외감이다(행 9:31 참조).효심으로서 경외이것은 또한 신학자들이 종종 “종들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두려움”과 비교해 “효심”으로 표현하는 경외감이기도 하다(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마음). 사실상,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졌던 효심이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그 효심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1–3)효심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기쁜 공경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 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반대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한 성령님은 주를 향한 경외감의 성령님이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이는 참으로 그 경이로움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용서는 경외감이 자라는 토양이다시편 130편 4절은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감이 자라도록 하는 비옥한 토양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공포스런 심판자고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인으로서의 자연적인 두려움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가지는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때문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자에게,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만 하는 자에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떨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ould Forgiveness Possibly Lead to Fear?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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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심
두려움
스코필드
예레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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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존번연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오는가?
by Scott Swain
2020-07-31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올까?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성경의 어디를 펴든 성삼위일체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삼위일체가 나온다고 단언하는 것은 쉬워도, 성경 안의 다양한 본문에서 삼위일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옛 성도들이 창세기 1장을 읽으며 과대 해석, 즉 해당 본문이 보여주는 것 이상의 삼위일체를 보는 오류에 빠지곤 했다면, 현대 독자들은 과소 해석, 다시 말해 그 본문이 보여주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덜 보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구약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포괄적인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구약에서 삼위일체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루터교 신학자인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는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두 가지 경륜에 의해 나타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구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후 신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삼위일체가 ‘없었고’ 신약에서는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차이는 상대적이다. 신구약 모두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드러나 있다.” 구약에서의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밭에 숨겨진 보화처럼(마 13:44; 골 2:2–3) “숨겨진 존재”여서,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드러난 존재”의 빛에 비추어볼 때에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지금까지 정리한 대로 삼위일체가 창세기 1장에서 어떻게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는 숨겨진 삼위일체의 존재를 보여주는 단서가 적어도 세 개 등장한다. 이 흔적들은 신약에서 보게 될 완전한 삼위일체의 계시의 구조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 1. 창세기 1장에는 주어-동사가 불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 명사인 “엘로힘(Elohim)”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되는데 이에 대응하는 동사인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동사다.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27절에서도 같은 형식이 등장한다.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강조하려 한 것일까? 천지 창조는 하나님 한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천상 존재들의 위원회 같은 것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누구의 지도나(사 40:13–14) 도움도 받지 않았다(사 44:24; 렘 10:12; 27:5). 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에서는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 근본적 구성 요소인 일신론(monotheism)이 등장한다. 하나님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그에게로 인도하신다. 일신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다신론(polytheism)의 형태로 가게 된다. 삼위일체 신앙은 일신론 안에서 이해해야 한 분 하나님, 세 위격에 대한 신앙이 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한 분의 천지 창조 안에서 등장한다앞서 살펴본 예들을 통해 하나님이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배웠다. 그 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지닌 위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며, 채우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에게 ‘이름을 주신다’(창 1:5, 8, 10). 또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 또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아직은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 위를 어미새처럼 운행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생명, 에너지, 지성, 그리고 풍족함을 세상에 공급하신다(창 1:2; 비교: 신 32:11).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고, 채우시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보여줌에 있어,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한 분 하나님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창조하신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홀로 창조하시며 다른 이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 창세기 1장에서는 여전히 “말씀”이나 “영”이라는 말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갖게 될 위상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단어들의 중요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야 전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하나님 한 분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시켜 보여줌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한 부분을 가르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 그의 말씀, 그의 영에 대해 어떤 구분을 하든지, 그것들이 마치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과의 구별인 것처럼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어떤 구별들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3. 그렇다면 그 복수 명사(plurals)는 무엇인가?위에서 다루었듯,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계속 복수 명사인 “엘로힘”을 사용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가 하나님의 삼위적(三位的) 충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복수(plural)로 표현하시는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가 창조는 한 하나님 그러나 세 위격의 작품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이 복수 명사가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진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표식이 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 26절을 살펴보자. 창세기 1장 26절에서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신 이 부분은 종종 소위 말하는 “장엄복수(莊嚴複數, royal we)”의 한 예로 설명되곤 한다. 왕이 자기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는 관용적인 표현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천사들의 천상 모임을 가리키시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욥 1:6; 2:1). 이 두 가지 모두 타당성이 부족하다. 전자의 경우 이것이 고대 근동에서 정말 관용적인 표현이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다. 후자는 창세기 1장 전체의 메시지와 대치되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와도 대치된다. 창조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천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천사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욥 38:7). 하나님은 그 자신만의 주권적인 권능을 통해 홀로 행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복수 형태로 말씀하신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어디에선가 말했듯,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온 복수(plural)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후보는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계시는 구약적 경륜과 신약적 경륜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구약 계시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해석할 때 최종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 계시의 수수께끼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약 계시를 통해서만 풀린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설정해준다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자취들은 신약에서 계시되는 완전한 삼위일체 계시의 구조를 위한 중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해준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연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분은 만물을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를 설정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이 생성되고, 빚어지고, 채워진 것이다. 창세기 1장은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 헌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빚어진 피조물, 즉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이 증거하는 성경의 주목적은 성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한 분을 위해 피조되고 구속되고 완전케 된 인간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증진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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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주일의 참된 의미
by 장대선
2020-07-23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방역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내에서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일시적으로 폐하고 각자 온라인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세대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무엇보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전염병 문제는, 주일예배와 관련된 신앙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주의 날에 교회당에 온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하거나 곤란하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주일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교리문답 ‘안식일의 거룩하게 함’(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을 통해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관련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이 편리한대로 모든 것들을 다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수단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며, 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주님은 모세의 자리(율법의 자리)에 서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도록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이셨다. 앞서 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율법의 가르침]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런즉 율법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한 개혁된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신앙은 전혀 개혁된 바 없이 여기저기 분란만 일으키는 사변적이고 문제투성이인 개혁자가 된다. 즉,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율법의 거룩함과 의가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선후 관계를 크게 오해한 자들이었다.한편,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7문답)에서 “그것들(봉사의 일들)이 경건의 의무들(예배의 의무들)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에 봉사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이] 틀어지든지 간에, 반드시 교회당에 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엄격하게 속박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라는 구절은,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라고 가르쳤다.사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을 보이고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거룩히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칫 그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특히 주일에 행하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마일리지를 적립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사(예배)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가 제사와 율법을 준행할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가 전부 다 사실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인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 결과 실제적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우리 자신과 이웃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 즉 예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도록 섭리하셔서 우리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일하시기도 한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해와 우리의 타락한 습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는 말씀을 곧장 우리의 영적인 나태와 방종의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유는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 규례에서 용인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마 12:11) 것이 당연한 이유는, 속히 꺼내지 않으면 양이 죽거나 다쳐서 적잖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불가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8문답)에서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그러한 봉사의 일들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필요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와 관계됩니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일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의 일들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재해들, 혹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예배와 경건의 일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과 주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를 하여 이 상황에 성경적으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공적인 행사들에 참여하는 것 외에 각자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모습인지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 아닌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1641년에 윌리엄 구지가 작성한 이 문답들이 영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봉사의 일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일들, 예배당을 향하기 전과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가정과 개인으로서 행하는 예배와 경건의 묵상,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도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 이제 교회는 신자들을 모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성도들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수고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장로들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열심만이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인 ‘치리장로’들이 성도들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본래의 직무수행 없이는, 각자 흩어진 가정에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도록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했던 주일예배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재정립하고,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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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은 누구인가
by Moses Y. Lee
2020-07-17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가장 애매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왕과 제사장이라는 영광스런 두 직분(dual honor)을 예수님이 어떻게 동시에 감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 신비스런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이 멜기세덱 왕조의 순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왕과 제사장 역할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만찬을 준비한 왕성경에 등장하는 아주 적은 양에 비해 구속사에 있어서 멜기세덱이 감당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고 그는 살렘(“샬롬” 즉 조화로운 평화를 의미한다)을 다스렸다.그의 삶과 사역을 묘사하는 세 구절에서(창 14: 18-20) 우리는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권한다. 아브라함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일조을 드렸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이 가진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속에는 성찬식에 대한 함의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왕을 기다리며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편인 시편 110편은 왕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구절이다. 다윗 왕은 미래의 왕을 생각하며 이 구절을 썼다. 어쩌면 기원전 971년 왕위에 오르기 전 솔로몬을 생각하면서 썼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윗의 핏줄에서 나올 후대 메시아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시편은 미래의 왕이 과거 그 어떤 왕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 그리고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그는 야훼의 대리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인 야훼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110:1).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야훼로부터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왕의 권능을 행사하며 주의 원수를 굴복시킨다(110:2). 또한 왕의 왕국과 그의 백성을 보호한다(110:3). 그러나 이런 메시아적 인물은 단지 왕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기도 하다(110:4). 한마디로 이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다윗 가문의 왕은 레위 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전체 기도를 주관하며 또한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제사장적” 역할까지 수행했다.그러나 이 구절은 다윗 왕조의 제사장 기능을 더 발전시켜서, 한때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여부스 가문의 왕-제사장과 완벽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 결과, 다윗 왕조는 약속의 땅을 통치하는 데 하나님의 신성한 지지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창세기 14장 18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향한 멜기세덱의 축복도 성취하게 되었다.5-6절은 다윗 왕과 야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2-3절과 평행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절을 보면 왕이 야훼의 오른쪽에 앉아있지만, 5절을 보면 야훼는 왕의 곁에서 그를 신성한 힘으로 지키고 도와주고 있다. 2-3절이 왕을 전쟁의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5-7절을 보면 야훼, 또는 신성한 전사(Divine Warrior)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으로 하여금 적을 물리치도록 돕는데, 그 적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적이다(“여러 나라”, “뭇 나라” 등). 이것은 기존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벗어나는 확장이다. 달리 말해 그 적장 왕들은 혼란에 빠진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야훼는 그 적들을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나라를 대신해서 그의 궁극적인 멜기세덱 족속의 제사장-왕을 통해서 물리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야훼의 구원 속에 있는 적용점은 단지 개인의 영혼 차원을 넘어서 육체적 측면 또 집단적 시스템, 나아가서 전 우주적 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시냇물을 마시면서 원기를 회복하는 야훼의 모습으로 마친다(110:7). 이 구절이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야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영원한 멜기세덱 족속의 왕-제사장신약에 가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의 수준을 아예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pre-incarnate Christ-figure)의 모습으로까지 끌어올린다. 멜기세덱은 영원한데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에 대한 확증이다(히 7:4). 멜기세덱을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한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진정한 의의 왕(“멜기세덱”)이 된다. 또한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의 왕(살렘)이다. 예수님은 또한 레위 계통이 아니기에(히 7:14), 그의 제사장직은 훨씬 더 우월하며(히 7:11)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히 7:17)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었다(히 7:22).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한다”(히 7: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님이 무한한 능력과 공의로 다스리는 완전한 왕이시기에 우리 믿는 자들은 안심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히 4:15) 완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도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이제 믿는 자들은 우리도 멜기세덱 족속의 한 사람으로서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 왕국의 가족으로서 진리와 공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또한 이 세상 뿐 아니라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비와 치료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o Is Melchizedek?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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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 어떻게 변증할까?
by 박용기
2020-07-16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불변의 소망’에서 기독교 소망과 세상 소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망은 내가 뭔가를 해서 즉, 간절히 바란다거나 노력을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받은 것으로 인한 소망이다.” 세상의 소망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얻을 수 있지만, 기독교의 소망은 이미 받은 소망이다.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 변증이란 신자가 소유한 소망에 대해서 불신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벧전 3:15).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상 변증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독교 변증을 준비해야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defense, 변증)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1. 삶을 통해서 변증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Apologia)다. 이 단어는 "from"(apo)과 "Reason" or "Logic"(logia)의 합성어로, 불신자들이 던지는 질문과 공격에 신자들이 이성적이면서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1세기 변증은 삶과 동떨어진 사변적 논쟁이 아니었다. 불신자들이 신자가 소유한 소망을 보고 그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때 대답해 주는 것이 변증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신자의 주관적 삶의 이야기와 객관적 변증의 관계를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에서 설명한다. ‘변증은 개인의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객관적인 복음 교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복음서 역시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스토리들을 잘 들여다보면 복음의 핵심 교리를 찾을 수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변증은 어려운 신학,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보다는 신자의 주관적인 삶 속에 녹아있는 객관적인 복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개인의 간증을 통해서 객관적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로 거룩해진 마음으로 15절의 헬라어 본동사는 명령형으로 “거룩하게 하다”이다. 이 본동사와 묶여서 형용사 “준비하되”가 해석된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always being ready to make a defense, NASB). 형용사 “준비하되”는 본동사 “거룩하게 하라”와 연결되어 해석되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곧 변증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마음이 거룩하게 되면서 변증이 준비되는 것이다. 3. 소망으로 바울은 성도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성도들이 소망으로 영화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롬 8:30). 1세기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구원을 성령님 안에서 보증(고후 5:5)받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살전 5:8)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옥문이 열린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은 그들을 본 빌립보 감옥 교도관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대답과 함께 자세하게 복음을 온 가족에게 변증했다(행 16:30-32). 4. 온유와 두려움으로 온유는 연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힘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변증은 신자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변증의 결과가 성령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적인 부담을 내려놓고 온유하게 변증할 수 있다. 신자들이 개인 간증을 할 때 내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인간적인 부담감 때문에 부풀려 이야기하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간증하고 변증해야 한다. 청년들 사이에서 ‘희망 고문’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같이 헛된 희망으로 고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소망은 썩은 동아줄처럼 결국은 끊어진다(잠 10:28). 어릴 때 연날리기를 종종 했다. 중랑천 다리 위에 서서 연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하늘에 떠 있는 연이 움직였다. 1세기 성도들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영화로운 구원과 소망의 줄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망의 삶을 보여줌으로 변증할 수 있었다. 2020년 7월, 한 해의 하반기로 넘어왔지만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이웃들이 많다. 모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때다. 산 소망을 소유한 성도들이 선한 행실과 진실한 믿음을 이웃에게 보여준다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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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삶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노승수
2020-07-13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 고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삼위일체는 고백일 뿐 삶의 구조나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은 자유주의가 일어나면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에 자기 계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 경륜 안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뭔가 조심스럽고 이해를 잘못하면 이단이 될 것 같거나 혹은 아예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관심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본다면 삼위일체를 뵙는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진술은 삼위일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사랑하는 분, 성자를 사랑받는 분, 성령을 사랑 그 자체라고 비유하며 이런 비유는 인간에게로 확대해서 인간의 영혼이 마음, 지식, 사랑 셋이면서도 한 영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비유로 놓으면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존재하며 현대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관계로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은 ‘관계’ 개념 없이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관계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인격 간의 관계를 의미하며, 이 인격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간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 삶에 실천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인격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삼위일체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삼위일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며 둘째는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περι)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코레시스(χώρησις)의 합성어로 상호 공재, 혹은 상호 침투로 번역된다. 직역을 하자면 “상호 간의 원형의 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우주와 인간의 원형을 원구의 형태로 이해했다. 특히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에서 별들의 운행을 춤(choreia)으로 이해했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를 완전하며 불변하는 구체로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차용했을 이 인격의 상호 침투 개념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엄마 품으로 올 때, 아이는 자기 내면의 무서움을 엄마에게 담아둔다. 엄마는 아이의 무서움을 담아주며 엄마와 아이의 인격은 서로를 모사하며 자기 동질성을 확보한다. 잠언에도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고 말한다. 인격은 서로에게 비치는 거울 같으며 상대의 감정의 일부를 담아주기도 하며 건네기도 한다. 죄인인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주로 미움과 분노를 건네지만 원래 인격은 사랑을 건네며 받아두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시므로 참 사람이 되시는 교리를 일컫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신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신 채로 인성을 입으신다. 그래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피곤하셔서 뱃고물을 베고 주무셔야 했지만 동시에 신성으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이신다. 이 둘이 모두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며 인격은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자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물론 기독론에서도 인격은 통로의 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통로는 우리 안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기도 하며 우리 밖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할 때, 이는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하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우리 몸과 영혼의 본성이 밖으로 주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과의 동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랑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삼위께서 동등하시며 남녀가 동등하고 부부가 동등하며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다. 그러나 동등한 관계에도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순종하신다.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나 고용주는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대우해야 하며 고용인은 고용 계약서의 법적 요구들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돕는 자로서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인격은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대상이 되는 인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부모의 인격적 반응을 통해 양육하지 않고 비디오나 TV에만 장기간 노출시키는 행위는 유사 자폐를 부른다는 연구도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비유했다. 각자의 숟가락이 있는데, 그 길이가 자기 입에 넣기는 불가하고 남에게 먹여줄 수만 있어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곳은 천국이요 자기 필요를 채우는 곳은 지옥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이란 서로의 짐을 담아내기도 하며 때로 내 어려움을 상대에게 담아주기를 요청하기도 하는 관계적 삶이다. 이것은 요청과 자발성에 의해서 이뤄져야 한다. 동등한 관계란 상대를 임의로 재단하지 않고 내 필요에 대해서 요청하고 상대의 필요에 대해서 물어보고 확인하며 요청이나 질문을 받았을 때, 자발성에 의해서 반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으로 사랑하며, 인격을 통해서 상대의 일부를 내 존재 안의 일부분으로 담아두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로서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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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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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격적연합
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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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더 깊고 깊은 죄
by Greg Morse
2020-07-10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맞았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어떤 태도나 행동을 “죄”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가 이제는 너무도 구닥다리로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기운 빠진 회중들을 향해 죄에 대해 꾸짖는 설교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 또는 그런 설교자와 엮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D.A. 카슨(D.A. Carson)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가 없는 한, 십자가가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Fallen: A Theology of Sin,’ 22).죄에 대한 얕은 생각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이끈다. 죄가 가진 엄중함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가진 심오한 세계를 맛볼 수 없다.가짜 그리스도들죄의 본질에 관해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싸구려 이해가 우리 주변을 채우게 되고, 그 가짜들은 각자 나름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인생 코치 예수. 죄를 출발점으로 보지 않을 때, 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보게 될 때, 우리는 죽음과 심판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불가능한 목표와 거창한 꿈을 성취하도록 돕는 ‘그리스도’에 치중하게 된다. 예수는 이제 착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우뚝 서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가정부 예수.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인” 우리가 당연히 저지르는 것으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즉, 죄는 애통해야 할 것이 아닌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죄는 단지 하나의 실수일 뿐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이 정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인간이 “악마”는 아니니까. 따라서 예수는 이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의 뒤처리를 해주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우리의 ‘사소한 실수’를 청소하는 청소비를 내주기 위해서다. 인본주의자 예수. 죄를 거룩한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면, 좋은 목적을 가진 대의명분을 아예 궁극적인 명분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예수는 이런 명분에 필요한 좋은 선전도구로 사용되며, 인간은 죄를 짓는 자와 그 죄로 인해 해를 당하는 자의 관계로 정의된다. 따라서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가 가장 열정을 쏟는 문제인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내게 임하소서(Kumbaya) 예수. 죄를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단지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존재로 보게 된다. 예수는 이제 우리의 문제와 스트레스를 들어주고, 이 땅의 새와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를 푸른 초원과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는 존재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이기에, 그는 굳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우리가 맘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왜곡된 그리스도가 주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무엇이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우리의 타락과 죄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류의 옷장 속에 넣어 놓은 해골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바로 아담 속에 있는 우리의 원죄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내 자신과 우리 시대가 짓는 죄의 수준을 벗어나 인류의 뿌리를 점거하고 있는, 바로 그 죄의 근원까지 내려가야 한다.아담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 또한 그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는지를 생각하는 이는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지은 죄의 역사는 우리 존재보다 앞선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노예의 굴레로 던져졌다. 우리 모두는 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죄에 빠진 상태다. 그리고 예수님, 진정한 그리스도가 또한 바로 그 장소에서 약속되었다. 어떻게 아담의 죄가 곧 우리의 죄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8-19)가 가능했던 것일까?다윗과 골리앗의 기념비적 전투를 생각해보자. 블레셋 거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의 왕이자 거인이었던 사울은 텐트에 숨어있었다. 그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참지 못했고,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골리앗이 다윗을 놀리자마자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냈고 그의 머리를 잘랐다(삼상 17:51).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을 것이다. 왜 다윗과 골리앗, 두 사람만 싸운 거지? 왜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거지? 우리는 골리앗처럼 쓰러졌다일대일 결투로 전쟁의 승패를 겨룬 마지막이 과연 언제일까? 이것은 바로 최고의 전사, 즉 우리의 “챔피언”이 상대편 챔피언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던 고대의 관습이다. 골리앗은 바로 블레셋의 챔피언이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다윗과 골리앗은 대표로, 그러니까 양측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만난 것이고, 그들의 싸움은 양쪽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다윗이 죽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의 챔피언이 사탄과 결투를 벌였고 그때 아내까지 아담의 곁에 있었지만, 아담은 패배했다. 뱀의 머리를 박살냈어야 했을 아담은 도리어 그의 자손까지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굴복했다. 우리의 대표, 우리의 전사는 그 사악한 뱀의 거짓말하는 혀를 잠재우지 못했고,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다.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된인류의 챔피언으로서, 또 창조주와의 언약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적과 싸운 아담은 쓰러졌고, 그의 자손들은 이제 아담의 타락성과 죄를 모두 다 상속하게 되었다. 아담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 즐겁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며, 또한 악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분노의 자식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이고 또한 우리의 조상이 패한 대상인 사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다(엡 2:1-3). 우리의 조상 아담 때문에, 우리의 신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 17:9)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리는 다 죄 중에서 태어난다(시 51:5). 우리의 죄가 단지 우리 자신의 정욕과 교만함 그리고 거짓말하는 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챔피언은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었고, 달콤한 선악과를 깨물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저주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에 수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탄과 맺은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라는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되었다. 두 전투 이야기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향하도록 한다. 동화 속 요정 예수, 정치적 활동가 예수, 집을 치워주는 예수가 아닌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첫 번째 아담은 궁극적으로 진짜 챔피언이 와서, 아담의 머리를 잘라버린 바로 그 적과 제대로 싸우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자 복수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롬 5:14). 이 세상에 죄가 한 사람으로 왔던 것처럼(롬 5:12), 용서도 다른 이를 통해서 온다(골 1:14).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줬다면(롬 5:15),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롬 5:17). 아담은 그의 자손을 저주와 타락으로 밀어넣었고 또한 그들을 사탄과 죄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두 번째 아담은 아버지를 위해 그의 형제들을 해방시켰고, 거룩함 안에서 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은혜와 신령한 도움을 준다(롬 5:16). 에덴동산에서의 전투 때문에 세상은 저주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이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챔피언은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에 의해 박살났지만, 우리의 진짜 챔피언은 이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을 박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죽음을 이겼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노예고 하나님의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고 또한 앞으로 맞게 될 세상에서 우리는 다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우리가 죄의 혈통을 잊을 때, 또 우리가 아담이 가져다 준 타락 때문에 죄 속에서 태어나 사탄을 따르는 자였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죄를 ‘가벼운 실수’ 정도로 여기고 서로의 상처를 너무도 쉽게 치유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행위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또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식적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유혹받기도 한다. 그러나 죄의 우물은 너무도 깊다. 우리의 죄는 너무도 오래되었고 우리의 노예 생활은 너무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전사가 필요했다. 다른 아담이 필요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는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Sin Runs Deeper Than You Think번역: 무제
복음
변증
아담
원죄
DA카슨
쿰바야
골리앗
챔피언
에덴동산
팀 켈러가 묘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김상일
2020-07-04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팀 켈러 ‘왕의 십자가’ 37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시간에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팀 켈러가 삶을 풀어내는 교리 특히 그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다. 현대 문화 안에는 기독교 교리가 추상적인 것, 일상의 삶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한 이런 고정 관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교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켈러에게 있어서 교리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서 (삼위일체론, 구원론, 종말론, 죄론 등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며, 따라서 켈러에게 교리는 성경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삼위 하나님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그렇다. 켈러는 자신의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King’s Cross)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성부), 비둘기 같은 성령,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켈러는 실제 유대교의 경전을 살펴보면서 왜 마가가 ‘비둘기’라는 비유를 통해서 성령을 묘사했는지, 거기에 숨겨진 더 큰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고 들어간다.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 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굼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왕의 십자가’ 33쪽).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워낙 인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교리이기에, 또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적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켈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개념 정리를 우선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분도 아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 만약 켈러가 여기서 멈췄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 아니 교리는 다 어렵다’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삼위 하나님이 서로 맺고 계신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읽어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지혜가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맺고 계신 그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불러들이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특히 루이스가 사용하는 삼위일체가 함께 누리는 “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켈러의 말을 들어보자.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오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 (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 (‘왕의 십자가’ 35-36쪽).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일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왕의 십자가’ 37쪽)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돈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산다. 우리의 하나님이 권력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모든 것을 건다. 우리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그 만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서 벗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없이)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추시는 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관계를 그려내시는지를 삶의 지혜로 깨달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양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왕의 십자가’ 38-39쪽).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켈러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만큼이나 우리의 이웃 또한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서 크나큰 시사점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 내 사역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시사점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 있다. 사역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기에 그렇다.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추며 배우는 관계적 진실성 켈러는 자신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역동성에 가장 필수적인 것 중 하나를 ‘관계적 진실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관계적 진실성,’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진실성이란, 1)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와 휴식과 문화생활과 공공 활동에 있어서 이웃과 같아야 한다, 588쪽), 2) 이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해주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관대함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보다 낮게 살아가는 법도 고려해야 한다, 589쪽), 3)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솔직하게 이웃에게 드러내면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적 진실성을 갖고 이웃에게,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켈러는 특히 관계적 진실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는다. 하나는 그가 조화 접근법(the blend-in approach)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거품 접근법(the Christian bubble approach)이다. 조화 접근법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향을 숨긴 채 관계적으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센터 처치’ 592쪽)을 가리키며, 기독교 거품 접근법이란,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 것”(‘592쪽)을 가리킨다. 왜 그리스도인임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면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가? 관계를 깊이 맺게 될 때 따라오게 될 희생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켈러는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 양쪽 모두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신자들 사이에 왜 관계적 진실성이 그렇게도 적은가? 그 답은 주로—전부는 아니지만—동기에 있다. 조화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용기가 부족하다. 그들은 영향력을 잃는 것, 무대 뒤에서 고초를 겪거나, 또는 직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품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센터 처치’ 595쪽).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들이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을 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춤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신 관계의 방식을 따라서 그 관계 안에 충분히 침잠되어 살아가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웃들과 맺어가는 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기를 통해서 가꿔간다는 말이 된다.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우리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갈수록,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될수록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갖고 사람들과 관계 맺어왔던 이전의 방식을 포기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듯이,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할 때 그 중심 동기는 단지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중심 동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찬양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A학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 취직이 잘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됐다. 다시 말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듣는다. 내게 모차르트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싶어진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왕의 십자가’ 34-37쪽).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시는 관계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에 둔다면, 우리의 사역 프로그램과 목회 방법론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지나치게 열심을 쏟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시작된 교리와 전통 읽기는 이렇게 삶으로 풀리며, 사역의 기술과 목회 방법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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